그 사람 만나다

가난을 직업으로 삼은 남편, 아내는 어땠을까?

윤태 2010. 8. 28. 09:24

2000년 3월 5일, 인사동 까페 <귀천>에서 목순옥 여사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같은 삶을 살다간 천시인. 아마 하늘나라에서 두분이서 새로운 소풍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 천상병 시인 사모님 목순옥 여사님과의 짧은 추억


고 천상병 시인의 사모님이신 목순옥 여사님께서 세상을 뜨셨네요. 검색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천상병 기념 사업회 통해 추모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별세하셨다니 말이죠. 종종 언론 통해 소식 접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다고요.

저도 시 쓰는 걸 좋아해서 90년대 말 졸업 한해를 앞두고 시 모임 동아리에서 자작시 시화전을 벌이며 공동 자작시집도 판매하며 그 돈으로 불우한 이웃을 도왔던 기억도 나네요.

그 후 연도별로 신춘문예 당선시집 죄다 사 모으고 원로시인들 시집도 사 모으고...결국 ‘당선을 목적’으로 한 시쓰기에 몰두해 월간 문학잡지 두군데 등단하고 김유정 문학에 응모해 장려상도 받아봤습니다. 아, 온라인에서 몇 번 상을 받은 기억이 있네요. 모두 시 부분이죠.

처음에는 시를 너무 좋아해 순수한 마음으로 시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나중에는 등단이라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돼 버리더군요. 시라는 것이... 삿갓만 쓰지 않았지 방랑시인 김삿갓과 늘 같은 저울대 위에 올려져 비교되고 있는 천상병 시인. 천 시인의 동심으로 Tm는 시를 배우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2000년 3월 5일, 인사동 까페 <귀천>을 찾아간 기억이 나네요.  졸업 당시 시화전을 펼쳤던 대학 선배 부부와 같이 갔지요. 시집 <귀천> 한모퉁이에 싸인을 받으면서 목순옥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 시간 넘게 정담을 나누긴 했는데 오래된 일이라...다만 기억에 남는건 커다란 주전자에 차를 끓여 몇 번이고 따라주시던 기억은 납니다. 까페 이곳저곳에 걸려있는 천상병 시인의 사진 등 흔적도 기억에 남고요. 그렇게 목순옥 선생님과 기념 사진 한 장 찍고 그곳을 나왔더랍니다.

그 후로 인사동에 몇 번 갔지만 두 번 다시 귀천을 찾지는 않았습니다. 세속에 물이 들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시를 쓰고자했던 그 순수함이 퇴색해버린 탓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2006년 다시 문을 연 안국동 시인학교에 출입하게 되더군요. 문인들 특히 시인들의 만남의 장으로 통했던 시인학교에 학생으로 잠시 다니다가 자퇴도, 퇴학도 아닌 그런 상황이 된 것이죠.

시에 대한 열정으로 저도 한때는 시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삶에 치이다보니 역시 안되더군요. 가난, 무직이 직업이었던 천상병 시인, 목순옥 여사님이 그 덕에 고생 많았지요. 이런저런 장사 해가면서 정말 고생 많이 하신 분이죠.

천상병 시인의 싯구절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부부의 정을 쌓게 되었네요. 이제 곧 가을이고 여기저기서 소풍들 많이 갈텐데 아쉽네요. 그나마 목순옥 여사님께서 계시니 천상병 시인 기념 사업회 통해 천시인의 시세계를 알릴수 있었고 간접적으로나마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말이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상병 시인과 함께 새로운 소풍을 준비하시리라 믿습니다.

시에 대한 열정으로 한때는 시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삶에 치이다보니 역시 안되더군요. 가난, 무직이 직업이었던 천상병 시인, 목순옥 여사님이 그 덕에 고생 많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