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10. 누렁아, 다시는 혼자 안보낼게

윤태 2007. 8. 24. 15:49

10. 누렁아, 다시는 혼자 안보낼게


외양간의 누렁이는 창민이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았다. 창민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누렁이는 창민이네 외양간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민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세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친구가 돼 준 것도 다름 아닌 외양간의 암누렁이였다.


어려서부터 창민이는 누렁이 등에 훌쩍 올라타곤 했다. 황소는 거칠어서 등에 올라탈 수가 없었지만 암누렁이는 달랐다. 논이나 밭을 갈고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암누렁이는 언제나 온순했다. 논에서 돌아오는 길에 널찍한 누렁이의 등에 올라타면 엄마 품처럼 포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창민이에게 늘 핀잔을 주곤 했다.


“야 이놈아, 얼른 내려. 소 허리 다쳐.”

“아이구, 아버지는... 소 힘이 이렇게 센데 무슨 허리 다친다고 그래요?”

“아니, 이놈이... 누가 네 등에 타고 있으면 좋으냐?”

“....”


이럴 때마다 창민이는 누렁이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녀석의 꼬리를 잡아당기며 쫓아가곤 했다. 덩치가 이렇게 큰데 허리가 다친다는 아버지 말씀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진 않았다.


그 날도 창민이는 뒷골 냇가 둑에서 누렁이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다. 누렁이가 풀을 뜯는 동안 창민이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냇가 둑에 흐드러지게 익은 산딸기를 따먹는 일이었다. 새콤달콤한 맛에 취해 창민은 벌써 냇가 둑을 따라 꽤 멀리까지 내려갔다.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에구, 너무 늦었다. 서둘러야겠는걸.”


그러나 창민이가 누렁이가 있는 곳에 왔을 때 누렁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쇠말뚝이 뽑힌 자국만 선명할 뿐이었다. 창민은 씩 하고 웃었다. 산딸기를 한 입에 털어 넣고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걸음에 집에 달려온 창민은 외양간 뒷문으로 얼굴을 빠끔히 디밀었다.


“누렁아 안녕. 또 만났네 또 만났어. 야속한 누렁이.”


창민은 가수 주현미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누렁이를 불렀다.


“음매.”


누렁이는 창민을 보자마자 큰 눈을 끔벅거리며 길게 음매를 외쳤다. 창민은 누렁이 목줄에 걸려 있는 쇠말뚝에서 줄을 풀어 외양간 기둥에 다시 매어 주었다.


15년 동안 이 외양간에서 살면서 수 천 번 걸어 다닌 논길을 누렁이가 모를 리 없었다. 논에서 고삐를 풀어놓기만 하면 누렁이는 1km 남짓 떨어진 집까지 혼자서 돌아오곤 했다. 논에서 일이 늦게 끝나는 날 아버지는 으레 누렁이의 고삐를 풀어 주며 “이랴” 하고 소를 몰았다. 잠시 후 집에 오면 누렁이는 어김없이 외양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소달구지를 매어 주며 뒷골 논둑에 가서 엊그제 베어놓은 꼴(소나 말에게 먹이는 풀)을 실어오라고 하셨다.


“야, 소나기 오겠다. 얼른 다녀와라. 말라서 무겁진 않을게다.”

“예, 아버지.”

“그리고 쑥 뜯어먹지 못하게 잘 봐라. 잘못 먹으면 큰일 난다.”

“예, 아버지. 다녀올게요.”


달구지를 다 매 주신 아버지는 곧장 깨밭으로 가 비료를 뿌리셨다.

창민이는 달구지 앞쪽에 타고 “이랴”를 외쳐댔다. 논에 도착한 창민은 베어놓은 꼴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싹 말라서 무겁진 않았지만 억새나 산딸기 줄기 때문에 얼굴이 베어지고, 찔리고 게다가 땀까지 솟았다. 상처난 부위가 자꾸만 쓰라렸다. 


30분만에 창민이는 꼴을 달구지에 모두 실었다. 그러나 창민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아버지 강요에 못이겨 깨밭 풀을 뽑아야 한다는 걸 창민이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꼴을 싣는 동안 창민이는 많이 지쳤고 스르르 눈이 감길 정도로 피곤했던 것이다.


“한 시간만 쉬었다 들어가야겠다.”


창민은 누렁이를 작은 아카시아 나무 기둥에 묶어놓고 바로 옆 미루나무 아래 풀밭에 벌렁 누워 버렸다. 먹구름 한 덩이가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걱정처럼 소나기는 올 것 같지 않았다.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이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릴 즘 창민은 코를 골았다.


풀벌레 소리에 잠을 깼을 때 누렁이는 없었다. 잠자는 창민을 기다리다 못해 집으로 먼저 들어간 듯 했다. 창민은 집을 향해 달렸다. 누렁이와 달구지가 없기 때문에 큰길로 갈 필요 없이 좁은 지름길로 내달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깨밭에 비료를 뿌리고 계셨다. 그런데 달구지를 달고 앞마당에 서 있어야 할 누렁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달구지 떼어놓고 외양간에 벌써 매어 놓았나 싶어 외양간에 들어가 보았다.


“누렁아, 나 왔다. 누렁아, 엇?”


그러나 누렁이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집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달구지도 누렁이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다리 건너 옆 동네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겁이 덜컹 난 창민은 다시 논으로 뛰어갔다. 논에 다다랐을 즘 저쪽 밭머리에서 누군가가 창민을 불렀다.


“창민아, 창민아.”


동일이 아버지가 창민을 불러 세웠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헉헉.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헉헉.”


창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전부절 하지 못했다.


“야, 너네 소 저기...”

“네? 저희 누렁이가요?”


동일이 아버지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누렁이가 동일이네 집 뒤 대나무 숲길에서 여유 있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니, 누렁이가 왜 저기에...”

“달구지 한쪽 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면서 누렁이가 중심을 잃고 같이 넘어졌단다.”

“...”

“넘어져서 발버둥치기에 내가 달구지 떼어내고 끌어다 매어 놓았지.”

“그랬군요.”

“그런데 창민이 너는 보이지도 않고... 좀 전에 집으로 달려가는 거 봤는데 부를 새도 없이 저쪽 샛길로 막 뛰어가더구나.”


논둑의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으니 동일 아버지 눈에 창민이가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다행이다. 누렁이가 발버둥치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을 다 흘리더구나.”


누렁이에게 다가갔을 때 정말 누렁이 눈 밑으로 털이 젖었다 마른 흔적이 보였다.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창민은 누렁이가 자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누렁아. 다시는 너 혼자 안 보낼게.”


창민이가 누렁이의 목을 끌어안자 누렁이는 약속이나 한 듯 창민이의 머리를 쓱쓱 핥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