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11. 십만원 월세방에서 나온 사연

윤태 2007. 8. 24. 19:48

11. 십만원 월세방에서 나온 사연


태식이는 첫 직장부터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 한 달 동안 다녔던 회사가 도저히 월급을 줄 능력이 안 되자 태식이는 이성필 부장을 따라 다른 회사로 옮겼다. 이성필 부장을 비롯해 모두 다섯 명의 직원들이 집단으로 이직을 한 것이었다.


태식이가 새로 옮긴 회사는 전에 다녔던 직장과 마찬가지로 조그만 신문사였다. 그러나 이 회사도 재정상태가 그리 튼튼한 곳은 아니었다. 벌써 두 달째 급여가 미뤄지고 있었고 직원들의 성화에 사장은 급여를 지급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약속 했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이 때문에 태식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 서울 큰누나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생활하고 있는 태식이는 일요일인 어제 조카들과 함께 용인 민속촌에 놀러 가 입장권을 끊으려다가 속만 상했다.


태식이의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누나이기에 식구들이 놀러갔을 때 누나가 늘 돈을 내곤 했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이번엔 태식이가 용인 민속촌 입장권을 사려고 했지만 돈이 부족했다. 2만원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명의 입장료는 모두 3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식이가 지갑을 폈다 접었다,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자 누나가 다가왔다.


“태식아, 됐어. 얼른 들어가자.”

“...”


누나가 이미 눈치를 채고 표를 사는 사이 태식이의 얼굴은 빨개지고 왠지 모를 설움에 눈물까지 났다. 민속촌 안에 들어가서도 태식은 내내 고개를 떨구며 끌려 다녔다. 조카들은 좋아하며 뛰어 놀았지만 태식이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 아침 회사에서 태식이는 오전 내내 어제 민속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월급만 제대로 나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내심 사장을 원망하고 있던 터였다. 이성필 부장과 함께 애꿎은 담배만 자꾸 피워댔다.


“이 부장님, 오늘은 어때요? 나올 것 같습니까?”

“글쎄. 오늘은 우선 반만 준다고 토요일 날 김 전무님이 말씀하시긴 했는데...”

“아휴, 한두 번이라야 말이죠.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

“야, 누군 안 그러냐? 오늘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 해결해 주겠지.”

“오늘은 꼭 받아야 하는데...”


그러나 퇴근 무렵 김 전무는 직원들을 불러놓고 지사 계약이 안 돼 돈이 안 들어왔다며 또 급여를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혹시나 했던 직원들은 역시나 하며 돌아섰다. 태식이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차라리 집에 안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는 태식이였다. 복잡한 심경 탓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태식은 어느새 누나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띵동 띵동.”


벨을 누르자 조카 영준이가 얼굴을 빼꼼이 내밀었다.


“누구세요? 아, 삼촌이네.”


문이 열리자 영준, 희준이와 사돈댁 딸인 미진이가 태식이 앞으로 모여들었다.


“삼촌, 삼촌, 피카츄하고 포켓몬스터 사왔어? “아, 뒤에 있구나. 얼른 줘.”

“...”


태식이는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게까지 구차한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식의 누나는 이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아이들에게 “얘들아, 삼촌 오셨으면 인사를 해야지. 뭘 달라고 그렇게 조르는 거야?” 라고 핀잔을 줬다. 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태식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날 저녁 태식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으로 건너갔다.


다음날. 직원들이 원성을 높이자 김 전무는 개인 돈을 찾아왔다며 차비 명목으로 5만원씩을 주었다. 5만원으로 일주일의 시간을 벌어 볼 셈이라는 걸 직원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태식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퇴근할 때 조카들에게 줄 피카츄와 포켓몬스터 그리고 피자 한판을 사들고 갔다. 


다음날. 출근한 태식은 이성필 부장과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부장님, 열흘 있으면 설인데 정말 큰일이네요. 시골 부모님을 어찌 찾아봬야 할지?”

“그러게 말이야. 그때까지도 해결 안 되면 이대로는 못 있겠다. 법적으로 하던지...”

“법으로 한다고 곧장 해결될 것 같지도 않은데요.”

“휴~”


이부장과 태식이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태식이는 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작년 11월 서울에 올라와 직장 생활하다 이번 설에 처음으로 내려가는 고향이었다. 절대로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회사에서 급여가 안나온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설 전날. 김 전무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봉투에 5만원씩 넣어 10명의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태식이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부모님 내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어머니가 그렇게 드시고 싶어 하는 굵직한 오렌지가 너울너울 스쳐갔다. 또 조카들에게 줄 과자종합세트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잠시후 태식이의 절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그 자리에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5만원이 든 돈 봉투를 구겨 휴지통에 던지고는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현관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담배 세 개비를 연달아 피워댔다. 그때 이성필 부장이 뛰어 나왔다.


“야, 태식아. 너 그렇게 하고 나가면 어떡하냐? 너 그렇게 하면 내 얼굴은 뭐가 되냐?”

“죄송합니다, 부장님. 너무 속상해서 그만...”


태식이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참고 또 참으며 소매로 계속 눈물을 훔쳤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 나왔다.


그 때 이부장이 태식이 앞에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구깃구깃한 편지봉투 아래 네 개의 봉투가 더 얹어져 있었다. 태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 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이...이게 뭐예요?”

“태식아, 너 누나 집에서 눈칫밥 먹는 것도 알고, 시골에 부모님 계신 것도 알어.”

“...”

“어차피 우리들은 집이 서울이라 시골 내려갈 일도 없고....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모았다. 자, 받아라.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부장님...”

태식이는 그 돈을 받는 다는게 너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명절인데 고향에안 내려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식은 고개를 푹 숙이며 돈을 받아들었다. 조금이나마 이성필 부장을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날 저녁 이성필 부장은 동대문 앞 골목에 자리 잡은 10만 원짜리 월세 여인숙에 들어가 짐을 꾸렸다. 눈을 맞으며 이불이며 옷가지며 모든 세간을 사무실로 옮겼다. 월세가 너무 많이 밀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