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13.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내

윤태 2007. 8. 25. 13:51

13.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내


병수 어머니는 요즘 화투에 푹 빠져 있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마을회관에서 늦게까지 화투를 치곤했다. 마을 회관에서 돌아와서도 병수 어머니는 화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올해 65세인 병수 어머니는 화투를 치면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둘째딸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화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꼬박 1년을 넘기고서야 화투 치는 요령을 간신히 터득하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어깨 너머로 간신히 한글만 깨우친 병수 어머니한테 넉 장의 비슷한 그림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특히 점수 따지는 일은 곤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도 병수 어머니는 마을회관에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화투를 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해서 5점이 되는 겨?”

“청단 3점하고 피가 열 한 장이니까 2점. 합이 5점.”

“저거 붉은 띠 있는 거 석장은 홍단 아닌감?”

“홍단은 2장뿐이구먼. 한 장은 초단이여 병수 엄마.”

“그래도 붉은 띠가 석장이면 1점 줘야 하는 거 아닌감?”

“아이구, 병수 엄마, 띠 다섯 장부터 1점 주는 거야. 여태껏 뭐 봤대 그래.”

“...”


병수 어머니는 젊은 아주머니들의 면박에 움찔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치매예방 때문에 화투를 배웠지만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언젠가는 젊은 동네 아주머니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꼭 참고 1년 동안 끈질기게 배워온 것이었다.


물론 집에 병수 아버지가 계시긴 했지만 장난이라도 절대 화투장을 잡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병수 어머니는 늘 혼자서 화투를 해야 했다. 혼자 패를 돌리고 1인 3역을 해가며 화투를 했지만 병수 어머니는 즐겁기만 했다. 병수 아버지는 이런 아내를 보며 겉으론 혀를 찼지만 속으론 뿌듯해했다. 느지막하게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취미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만좀 하지. 잠자게 불 좀 꺼.”

“좀 배우려고 하는데 왜 자꾸 그라요? 상대해주지도 않으면서...”

“아이구, 할매야. 거 졸리지도 않아?”

“정히 졸리면 저 쪽방 가서 먼저 주무시구랴. 나는 더 있다 잘 테니.”

“정말 못 말리는 할매야.”


사실 병수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흥이 나 있었다. 모레가 병수 어머니 생신인데 도회지에 있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모두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눈치 볼 것 없이 자식들과 화투를 실컷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병수 어머니는 벌써부터 설레고 있는 것이다. 그날을 위해 밤 늦게까지 혼자 화투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신 전날 안산에서 내려온 둘째딸이 물었다.


“엄마, 화투가 그렇게 좋아? 우리 엄마 화투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것아, 잔소리 그만하고 담요나 깔어.”

“알았어. 엄마 오늘은 딱 열 번만 돌리는 거야?”

“잔소리 그만하고 담요나 깔라니까.”


병수 어머니는 마음이 급했는지 담요가 깔리기도 전에 방바닥에 패를 늘어놓았다. 두시간쯤 지났을까. 화투는 벌써 스무 판을 넘고 있었다. 딸들은 일찌감치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그러잖아도 낮 동안 생신상 음식 차리고 부엌일 하느라 피곤에 지친 딸, 며느리들이었다. 


어느덧 큰며느리도 슬그머니 들어가 버렸다. 남은 건 막내며느리인 병수 아내뿐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병수 어머니는 화투를 그만 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며느리인 병수 아내가 먼저 그만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벽 2시가 되어 ‘딱 딱’ 소리에 잠이 깬 병수는 그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화투판을 벌이고 있는 아내가 안타까웠다. 병수는 한 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화장실에 숨어 아내한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내는 화장실에 가야한다고 어머니께 말하고 병수가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어머니께 말씀 드려줄까?”

“아냐, 신경 쓰지마. 얼른 들어가서 자.”

“내일은 김치도 담가야 하고 모레는 출근도 해야 할 텐데 피곤하지 않아?”

“나야 오늘밤만 피곤하면 되지만 어머니는 내일부터 계속 심심해하실 거잖아. 그거 생각하면 오늘 밤새 해도 부족해.”

“....”

“그리고 나 피곤한 거 어머니 다 아시면서도 아무말씀 못하시잖아. 그 마음 헤아려봤어?”

“...”


병수는 아내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가 말을 이었다.


“잠시 동안의 내 고통이 어머니께 커다란 기쁨이 된다는 거 생각하면 나도 기뻐.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


병수는 아내를 향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자식인 병수보다 며느리인 아내가 어머니의 마음을 속 깊게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