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15. 엄마 죄송해요

윤태 2007. 8. 26. 12:53

15. 엄마 죄송해요

초등학교 3학년인 광민이는 학교가 파한 후 논에서 부모님과 함께 벼를 베고 있었다. 오전에 학교에서 수복이, 기철이와 함께 소탐산으로 상수리를 주우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광민이는 부모님께 꼼짝없이 붙들려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논머리 큰길가에 수복이와 기철이가 쌀포대를 메고 소탐산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두 녀석은 광민을 향해 펄쩍 펄쩍 뛰면서 손짓을 하다가 쌀포대를 빙빙 돌려보기도 했지만 광민이는 낫질을 계속 해야만 했다. 두 친구들이 그럴수록 한 발짝도 꿈쩍 못하는 광민이는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 갈 뿐이었다.


“광민아, 뭐하냐? 또 논에 있냐? 야, 상수리 털러 가야지?"


멀리서 수복이와 기철이가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같이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눈물까지 났다. 용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야 한다는 생각에 광민이는 절망에 빠졌다. 1킬로에 3백원이나 하는 상수리를 셋이서 주우면 50킬로는 거뜬한데 이렇게 매여 있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때 광민이는 꾀를 생각해냈다. 다리에 살짝 상처를 내고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들어가 있는 척 하다가 몰래 수복이와 기철이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험하게 자라온 광민에게 있어 그깟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을 굳게 다진 광민이는 벼 포기 앞으로 다리를 바짝 대고 눈을 감은 채 낫으로 살짝 그었다.


“아야.”


뜨끈한 피가 주루룩 흘렀다. 옆에서 벼를 베던 엄마가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광민아, 왜그러니? 낫으로 베었냐?”

“아, 아파, 아야.”


광민이는 엄살을 떨었다. 엄마는 상처 난 곳의 피를 입으로 빨기 시작했다.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광민이는 너무 죄송했지만 친구들과 상수리를 주우러 가고싶은 마음이 앞서 있었다.


“아이구, 쇳독 오르면 안 되는데, 광민아 잠깐만 여기 누워 있어.”


엄마는 둑에 가서 쑥을 한 움큼 뜯어왔다. 낫 머리를 이용해 넙적 돌에 쑥을 올려놓고 찧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상처에 철썩 붙였다. 그러나 샘물처럼 솟는 피는 멎지 않았다. 그때 논머리에 있던 아버지가 달려왔다.


“야, 어쩌다 그랬냐? 집에 가서 아주까리기름 바르면 금방 멎어. 얼른 가.”


순간 광민이는 귀가 번쩍 띄었다. 추석 연휴에도 논에 붙잡아 놓는 아버지께서 집에 가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광민이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광민이는 집 쪽을 향해 돌아서면서 다리를 크게 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아야.”를 연발했다.


“광민아, 안되겠다. 걸어가다가 상처 난데 피 몰리면 안 돼. 엄마한테 업혀라.”

“괜찮은데...”


광민이는 마지못해 엄마 등에 업혔다. 등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너무나 포근했다. 엄마의 냄새가 좋긴 했지만 너무 미안했다. 지난여름에 외양간에서 소똥을 치우던 엄마가 황소 뒷발에 채인 이후 몸이 좋지 않다는 걸 광민이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말로는 갈비뼈에 약간 금이 가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바쁜 농촌일 때문에 변변한 치료한번 받지 못한 터였다.


명철이네 집 앞마당을 지나자 외양간에 가려 논에 계신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광민이는 양심 때문에 더 이상 엄마 등에 업혀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 이제 내려 줘. 나 혼자 걸어갈 수 있어.”

“그래. 들어가서 약 발라. 부엌 두 번째 선반 위에 사과 있으니까 배고프면 꺼내먹고.”


엄마가 돌아서서 명철이네 외양간을 지나가자 광민이는 검정 고무신을 벗어들고 집을 향해 뛰었다. 마음 한켠이 찜찜하면서도 상수리를 주우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 기뻤다. 상처의 쓰라림은 느껴지지도 않았고,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야호, 이젠 자유다.”


집에 들어온 광민이는 아주까리기름을 바르고 헌 메리야스를 찢어 상처 난 다리를 동여매었다. 부엌 두 번째 선반 위에서 사과를 한 개 집어 옷에 쓱 문지르고는 덥석 베어 물었다.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사과를 먹고 난 광민이는 쌀포대를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엄마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꽤 멀리 돌아 소탐산쪽으로 향했다. 참나무가 많이 모여 있는 산 중턱 평지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수복아, 기철아 어디 있냐?”

“수복아 아, 기철아 아 어디 있냐 아아아.”


그러나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참나무 밑에는 상수리 껍질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와, 녀석들 벌써 상수리 다 털고 갔네.”


한 발 늦은 것 같았다. 광민이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너털너털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광민이는 산길에 떨어진 알밤을 몇 개 주웠다. 욕심이 난 광민이는 돌을 던져 밤 몇 알을 더 땄다. 상수리 대신 쌀포대에 밤이라도 주워 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오니 뒷골 논에서 벼 베는 부모님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허리를 구부리고 낫질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논둑에 두 다리를 펴고 앉아 주먹으로 무릎을 톡톡 치고 있었다. 서서 낫질을 하다보니 관절염이 도진 모양이었다.


광민이는 고민에 빠졌다. 멀리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야 할지, 다시 논으로 가야할지 선뜻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쇳독을 없애야 한다며 입으로 생채기를 빨아내던 엄마, 엎어주면서 찬장에 사과 꺼내먹으라고 말씀하시던 엄마. 또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하시는 아버지 모습도 떠올랐다.


광민이는 몇 알 안 되는 밤이 담긴 쌀포대를 빙빙 돌리며 순식간에 엄마한테로 달려갔다.


“야, 광민아. 너 다리는 어쩌고 논에 왔냐?”

“응, 아주까리기름 발랐더니 금방 낫네. 헤헤. 엄마 내가 밤 주워왔다. 먹어볼래?”

“녀석도 참...”


광민이는 엄마의 낫을 얼른 뺏어들고 밤 속껍데기를 벗겼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밤은 술술 잘도 까졌다. 광민이는 뽀얗게 벗겨낸 밤알에 군데군데 묻어있는 속껍질을 바지에 대고 쓱쓱 대충 털어 내고는 엄마 입속에 넣었다.


“오도독~ 오도독~ 야, 밤 참 잘 영글었다.”


엄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광민이도 알밤을 먹고 싶은 마음에 침이 넘어갔지만 참았다. 엄마가 한 알을 다 드시기 전에 또 한 알을 까야만 했다. 알밤을 드시는 동안, 잠깐만이라도 엄마를 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가 뉘엿뉘엿하면서 서쪽에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소슬바람이 살랑이면서 황금 들판을 더욱 더 진한 황갈색으로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