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6. 취업선물에 먼지 쌓이면 안돼

윤태 2007. 8. 23. 14:43

명섭이는 직장을 그만둔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났지만 새 직장에 들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워낙 불황인 탓에 기업들도 인원을 줄이는 상황에서 취직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물론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에 빚만 늘어갈 뿐이었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아내의 한숨은 날로 늘어만 갔다.


“여보, 좀 알아봤어요?”

“응, 계속 알아보는데 마땅치가 않네.”

“급여가 낮더라도 우선 임시라도 들어갈 데 없을까요? 다니면서 다른 직장 알아보게.”

“나와 있는 일자리가 없네. 요즘 워낙 불황이라...”


사실 명섭이는 여러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아 번번이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명섭이의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심지어 온 몸이 쑤셔오기까지 했다. 일을 하지 못해 병이 난 것이다.


명섭이가 전에 직장에서 영업 사원으로 일하며 가방 메고 하루 종일 사람 만나러 돌아다닐 때는, 비록 힘들고 피곤해도 이렇게까지 몸이 아프진 않았다. 활동을 안 하니 소화도 안 되고 밥맛도 없고, 심적 부담은 늘어가니 당연히 병이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섭이는 오히려 영업사원이었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행복한 추억에 잠겼던 명섭은 그 날, 영업사원 때 메고 다녔던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걸쳐 보았다. 너무 가벼웠다. 가방 속에 책을 몇 권 넣고 안방, 거실을 돌아다녔다. 마치 직장에 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진 명섭이는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때 마침 퇴근해 들어오던 아내가 거실 유리창을 통해 이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여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어, 와...왔어? 옛날 생각이 자꾸 나서...”


명섭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여보, 저...우리 큰일 났어요.”

“왜?”

“사실은 석 달 전부터 생활비가 부족해서 아는 사람한테 돈 빌리고 있어요. 당신 취직할 때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빌린 돈이 벌써 3백만 원이예요“

“...”


명섭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힘이 빠지고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결혼 전 명섭이가 들어놓은 이자가 꽤 높은 적금을 그동안 아내가 빠짐없이 넣었고 한번이라도 거르거나 미뤄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내는 돈을 꿔서 채워 넣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여태껏 많이 기다렸지만...”

“....”


그러나 이번에는 아내가 아무 말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취직하기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순 있었지만 이럴수록 명섭이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서는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아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시름의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명섭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주일 전에 면접을 봤던 한 회사에서 명섭을 채용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월급이나 다른 조건을 구체적으로 협의해야하니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한번 회사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명섭이보다 아내가 더 기뻐했다.


“여보. 정말 잘 됐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죠?”


명섭의 아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뭔가를 새롭게 꾸려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내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그 날 저녁 명섭과 아내는 영화를 한편 봤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영화였지만 명섭의 눈과 귀에는 영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양복 입고 출근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얼른 화요일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다음 날 저녁 퇴근해 들어온 아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큼직한 선물을 내놓았다.


“여보, 정말 축하해요.”

“웬 축하? 그런데 무슨 선물이 이렇게 큰 거야?”

“당신이 평소 갖고 싶어 하던 거예요. 펼쳐봐요.”

“뭘까?”


명섭이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선물을 뜯기 시작했다. 선물 속에는 새카만 가방과 구두 그리고 조그만 구두칼이 담겨 있었다. 명섭은 지난 3년 동안 가지고 다녔던 가방이 지퍼가 벌어지고 또 작다고 아내에게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비 오는 날엔 구두에서 물이 새 발이 퉁퉁 불었던 것을 아내는 속으로 늘 간직하며 마음 아파했었다.


“여보, 어때요? 가방 지퍼 벌어지고 좁아서 서류 넣기도 힘들고 구겨진다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이 구두 3년 동안 갖고 다니던 구두 표로 산거니까 잘 신어야 돼요. 걸음 험하게 걷지 말구..., 새 신발이라 처음에는 손으로 신기 힘들 거예요. 구두칼 가지고 다니면서 쓰세요. 작아서 갖고 다니는데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순간 명섭은 눈물이 핑 돌았다. 휴대용 구두칼까지 챙겨주는 아내의 마음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진작에 취직하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다.


그 날 밤 아내가 잠든 사이 명섭은 새 구두를 신고 가방을 멘 채 안방과 거실을 돌아다녔다. 내일 그 회사에 협의하러 갈 생각을 하니 잠도 오지 않고 한없이 들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출근한 직후 명섭은 채비를 서둘렀다. 새 구두를 신고 굳이 멜 필요도 없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출입문을 통과하려고 할 즘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명섭씨죠?”

“예. 그런데요.”

“여기 ○○ 회사인데요. 오늘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했죠. 그런데 다른 분이 이미 들어오기로 약속이 돼서...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정말 미안합니다.”


명섭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명섭이보다 급여를 낮게 제시한 사람이 먼저 뽑힌 것이었다.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잘 하고 오라던 아내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명섭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집을 향해 뛰었다.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집에 도착한 명섭이는 컴퓨터를 켜고 자기소개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취직선물에 먼지가 쌓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