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실동화

[사실동화] 8. 화초콩아, 잘 살아 있어

윤태 2007. 8. 24. 03:49

8. 화초콩아, 잘 살아 있어


대전에서 청주로 학교를 다니게 된 수홍이는 당분간 독서실에서 생활을 하기로 했다. 전세를 얻어 4년 동안 자취생활을 하려면 좋은 집을 구해야 하는데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우선 한 달에 10만원 하는 독서실에서 생활을 하게 됐다.


대신 다음 학기엔 아버지께서 돈을 마련해 집을 구해 주기로 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신 아버지는 이번 여름 방학 때 황소 서너 마리를 팔기로 한 것이다. 아직 소가 다 크지 않았기 때문에 독서실 생활이 불편하더라도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역시 독서실 생활은 불편하고 지루했다. 수업이 끝나고 들어오면 조용히 앉아 공부하거나 좁은 통로에 누워 있는 게 전부였다. 나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사실상 옆방과 경계가 없어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심지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일도 쉽지 않았다. 특히 밤 10시가 넘으면 독서실 현관문을 잠갔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힌 생활을 해야만 했다.


수홍이는 답답한 마음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층 독서실 창가에서 물끄러미 맞은편 주택가의 빌라를 보고 있던 수홍이는 무릎을 딱 쳤다.


“그래 바로 저거야.”


수홍이 본 것은 맞은편 빌라의 창가 베란다에 올려놓은 화분이었다. 수홍이는 곧바로 화원으로 달려갔다. 무슨 식물을 키울까 생각하던 수홍이는 화려한 꽃이 피는 화초콩을 심기로 했다.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꽃나무를 사는 것보다는 씨앗을 심어 싹이 트는 모습부터 보고 싶었다.


수홍이의 화초콩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수홍이는 화분에 화초콩 세 개를 심고 물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물을 주고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까지도 화초콩은 싹을 틔우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수홍은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화분의 흙을 살짝 파보았다. 1센티미터 가량의 싹이 터 있었다. 단지 흙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수홍이는 하루 종일 화초콩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금쯤 싹이 올라왔을까? 햇볕이 너무 강해서 혹시 말라죽은 건 아닐까?”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수홍의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수홍이가 이렇게까지 신경쓰는 이유는 그의 성격이 너무 세심한 탓이기도 했다. 여하튼 화분속의 화초콩이 있어 수홍은 독서실에서의 답답함이나 외로움을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다.


화초콩 생각에 뒤척이던 그 날 밤 수홍이는 세 개의 가녀린 희망을 보았다. 손전등을 비췄을 때 뽀얀 색깔의 세 녀석이 가녀린 손을 흙 위로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와, 정말 반갑다 화초콩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수홍이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치 몇 십 년 만에 이산가족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수홍이는 뛸 듯이 기뻤다. 화초 콩으로 인해 인생의 희열을 맛보는 듯 했다.


이튿날부터 수홍이는 화분을 창가 안쪽에 두었다. 햇볕이 너무 강하면 독서실 벽에 압정을 꽂아 실을 매달고 실 끝에 빨래 깍지를 묶은 다음 신문지를 물려 햇빛 가리개도 만들어주었다.


화초콩은 하룻밤 사이 3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처음에는 볼펜을 꽂아 주면 잘 타고 올라갔는데 이젠 50센티 정도의 지지대가 필요했다. 수홍이는 우암산에 올라가 올곧은 싸리나무를 몇 개 꺾어다 지지대를 세우고 줄기가 이탈하지 않도록 노끈으로 묶어주었다.


4월 중순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수홍이는 화분을 바깥 창가에 내놓았다. 물을 주는 것보다 자연적인 습기를 맞게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지지대가 좀 불안하긴 했지만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독서실 앞 두꺼비 슈퍼에서 컵라면을 사들고 계단에 앉아 먹고 있었다. 독서실 방으로는 어떤 음식도 가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의 학생들은 종종 계단에 앉아 컵라면을 먹곤 했다. 때마침 비가 내리는 탓에 수홍이는 따끈한 컵라면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때 현관 창문 밖으로 가로지르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화초콩이 심어져 있던 화분이 독서실 3층 창가에서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수홍이는 먹던 컵라면을 내던지며 황급히 내려갔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빌고 또 빌며 1층을 향해 뛰었다. 


붉은 플라스틱 화분은 산산조각이 났고 화초콩 줄기도 군데군데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지대에 노끈으로 줄기를 묶어 놨기 때문에 뿌리가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수홍이는 무너지는 억장을 추스르며 컵라면 용기에 화초콩을 옮겨 심었다.


날이 밝자 수홍이는 우암산 자락 인적이 드문 곳의 나무 밑에 화초콩을 옮겨 심었다. 독서실에서는 더 이상 화초콩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별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날 밤 수홍이는 꿈을 꾸었다. 붉은 꽃이 활짝 핀 화초콩이 우암산 자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의 꿈을....


그로부터 6개월 후. 2학기가 되면서 수홍이는 꽤 쓸만한 전셋집을 얻었다. 그동안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친구들과 모여 술도 마시고 TV도 보고 기타도 치며 놀았다. 독서실에서의 갑갑한 처음 기억은 모두 잊혀지는 듯 했다.


10월 초 가을빛이 감돌쯤 수홍이는 혼자서 우암산에 올랐다. 가을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싶어서였다. 수홍이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사실 수홍이가 화초콩을 잊은 건 아니었다. 컵라면에서 옮겨 심은 그 날 이후 어쩌면 화초 콩이 말라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그동안 일부러 우암산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 두려운 마음이 많이 삭혀져 있었고 언젠가 한번은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큰마음 먹고 산을 오른 것이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수홍이는 화초콩이 심어져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화초콩이 어떤 형태로 있던간에 수홍이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곳에 다다랐을 즈음 붉은 꽃들이 희미하게 퍼져있는 풍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홍이는 한걸음에 화초콩이 심어진 곳까지 뛰어갔다.


그날 수홍이는 우암산 자락에서 붉은 궁전을 보았다. 화초콩을 묻고 돌아온 날 밤 꿈에서 보았던 붉은 화초콩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수홍이의 눈에는 기쁨인지, 반가움인지 아니면 그 당시의 슬픔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마구마구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