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이야기

새끼 낳다가 죽을뻔한 어미소, 아버지와 제가 살렸습니다

윤태 2009. 4. 28. 08:20



지난 주말 시골에서 못자리를 하고 왔습니다. 고속도로 정체 시간을 피해 토요일(25일) 밤 10시쯤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토요일 오전까지 일을 하고 간데다 운전까지 하니 피곤해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26일 새벽 2시, 거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얼핏 잠이 깼습니다. 곧이어 창 넘어 외양간에서 들리는 소 울음소리, ‘또 황소 이녀석이 고삐를 풀고 뛰어다니나’ 싶었습니다.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잠시 후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워낙 느긋하신 분이라 좀처럼 급한 일이 아니면 급하게 저를 찾지 않는데 분명 무슨 일이 생긴 듯 했습니다.

앞다리만 나온 송아지 한 발씩 잡고 죽을 힘 다해 당겨보니.. 

총알같이 외양간으로 달려가 보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암소 한 마리가 축 늘어진 채로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고 아버지는 뭔가를 끌어당기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미소가 새끼를 낳고 있는데 출산하는 자세가 벌써 잘못돼 있었습니다.

그동안 시골에서 자라면서 송아지 낳는 장면은 수백 번을 봐왔지만 대부분 서서 출산했는데 지금 보고 있는 녀석은 죽을 자세로 누워 숨을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새끼 앞다리 두개가 30센티 정도 나와 있었고 주둥이도 조금 나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녀석의 앞다리를 한쪽씩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하늘이 노래지도록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얼굴의 핏줄이 터져나갈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빨리 송아지를 꺼내지 않으면 어미도 송아지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길쭉한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늘어진 혓바닥만 보며 힘껏 당겼습니다. 앞발과 주둥이 일부분만 나와 있는 상태로 아직 탯줄로 숨을 쉬는 탓인지도 몰랐습니다.

어미소는 힘주고, 우리는 당기고...우리가 포기하면 그들은 죽는다

아버지는 어미 소가 힘을 줄 때 맞춰 당겨보자고 했습니다. 이번엔 내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어 당겼습니다. 잡아당기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습니다. 이러다가 송아지 앞발 뼈가 상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아직 물렁뼈의 송아지니까요.

10여분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힘을 써본적은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라 사력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단순히 짐승이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우리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그리고 한편으론 늘 가족같은 녀석들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쑤욱’ 하는 소리가 함께 녀석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순간 머리가 아찔했습니다. 마치 운동장에 한참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섰을 때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녀석을 거꾸로 쳐들어 외양간 가로 쇠봉대에 걸쳤습니다. 그렇게 해야 폐속의 양수를 빼내고 호흡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무거웠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힘을 합쳐 녀석을 들어올리는데도 쉽게 들어올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빠지고 축 늘어진 송아지이지만 갓 난 송아지가 원래 이렇게 무겁진 않았습니다. 그동안 경험에 비춰보면 말이죠. 죽은 뱀 형태를 하고 있는 늘어진 송아지, 이거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후 녀석은 콧바람을 몇 번 불어내더니 눈을 멀똥멀똥 떴습니다. 더불어 어미 소도 금세 기력을 찾아 일어서서 새끼를 핥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제가 토요일 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별 다른 이야기를 못 듣고 그냥 잠자리에 들어 무슨 상황인지 몰랐는데 이야기를 들고 나서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와 저의 도움으로 갓 태어난 송아지. 그 아픔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미는 본능적으로 새끼 몸을 핥아주고 있습니다. 초산입니다.



아버지 왈 "운때가 좋아 어미와 새끼 살았다"


이 어미소 초산인데 출산 예정일을 벌써 열흘이나 넘겼다고 합니다. 뱃속에서 열흘을 더 살았으니 몸집이 엄청 불어나 무거웠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대부분 예정일보다 좀 빨리 낳는 편인데 유독 이 어미 소만 늦었다는 겁니다. 예정일보다 열흘 빨리 낳는 소들에 비하면 결국 이 송아지는 20일이나 더 늦게 태어나는 셈입니다.

그러니 송아지가 몸집이 커 쉽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게다가 초산이니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둘째부터는 순풍순풍 낳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녀석이 수놈이다 보니 몸집도 더 컸던 겁니다. 어미소도 힘이 부치다보니 서서 힘도 못주고 그냥 주저앉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머니께서 속이 쓰려 잠이 깨 물 마시러 부엌에 들어갔다가 심상치 않은 소 울음소리를 듣고 파자마 바람으로 달려가 그 광경을 목격하신 겁니다. 어머니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어미 소는 밤새 그 자세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새끼와 함께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령 발견하셨다해도 아버지 혼자 힘으로 출산을 도울 수 있었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어차피 어머니는 전혀 힘못쓰시는 ‘노약자’시고 그날 경험상으로는 아버지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역부족일 가능성이 커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아버지도 여러 번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아니었다면 새끼를 낳지 못했을 거라고 말이죠. 운 때가 딱 맞아 어미 소와 새끼가 살아난 것이라고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더라면 참 많이 속상했을 겁니다. 금전적인 손실도 그렇지만 한평생을 소와 함께 한 아버지와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는 제 입장에서도 참 마음이 무척 안 좋았을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를 낳아 키우신 부모님 생각도 더 하게 됐구요. 산부인과가 아닌 모두 시골집에서 태어난 우리형제. 아마 이 어미 소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