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이야기

어르신들이 병원 가기 싫은 이유

윤태 2009. 4. 25. 09:02


무척 완고한 성격의 장인어른께서 현재 성남의 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에 계십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병원은 안가시겠다며 몇 십 년 동안 버텨오던 장인어른께서 노인병원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십니다.

수년전 옥상에서 낙상하신 이후 허리 부상으로 쉬고 계시던 장인어른께서 지난해 또 한번의 낙상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살살 거동하시던 중 지난 2월 무거운 물건을 드시다 또 한번의 허리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 부상으로 뭔가를 붙잡고 일어서거나 엎드려서 살살 기어 다니실 정도로 악화되셨습니다.

병원에 가자고 말씀드리면 화내시며 절대로 안 가시겠다던 장인어른은 아내의 설득과 극심한 허리통증에 드디어 처가 근처에 있는 서울의 한 대형병원(대학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2월 말일께의 일입니다.

그런데 장인어른께는 이 부상과 함께 막걸리라는 복병이 있었습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막걸리를 드셨고 식사는 거의 안하셨습니다. 그 좋아하시는 막걸리로 연명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안주로 드시는 김치조각과 막걸리가 식사의 전부였던 셈입니다. 부상과 함께 힘이 없어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드시는 게 없으니 말이죠.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각종 검사를 했는데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거의 안하시고 막걸리를 수년째 매일 드셔도 간이나 위, 장 등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뼈에 뭔가 보인다며 골암인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정밀 진단결과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연일 또 다른 많은 검사가 이어졌고 하루가 멀다 하고 혈액을 채취했습니다.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혈관에 주사바늘 넣기도 힘든 상황에서 급기야 장인어른은 ‘왜 매일 피만 빼 가느냐’며 역정을 내셨습니다.

의학드라마에서처럼 20대 중후반의 앳된 전공의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아침에 한번 그 앳된 의사들이 병실을 다녀갔습니다. 장모님 혼자서 병실을 지키고 계셨기에 검사 결과나 상태를 이야기해도 장모님은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셨습니다. 장모님과 식구들은 이 의사, 저 의사가 하는 말들이 달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처음에 진통제 탓인지 혼자 걷기도 하시고 부드러운 것으로 식사를 하시던 장인어른께서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제, 진통제 등 링거를 꽂은 상태로 며칠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변을 볼 수 없었고 전혀 하지 않던 기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식물을 거의 넘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속 누워 계시다보니 욕창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좋아하시던 막걸리라도 들어가면 혹여 소변이라도 시원하게 보실까 생각도 해봤지만 기력이 어찌나 쇠약한지 물조차 넘기기 힘든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방광에 소변 줄을 끼어 강제로 소변을 빼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로감염이 생겼다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항생제를 투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변은 나오지 않았고 더욱 악화돼 갔습니다.

의식도 오락가락 하셔서 식구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계셨습니다. 상태가 좀 좋아져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눈 뜨는 것조차 힘겨워하시고 입을 벌려 간신히 숨만 쉬셨습니다.

의지력이 강하신 분이니 혹시 손자, 손녀들을 보시면 기력이 돌아올까 해서 흔들어 깨워도 봤지만 도저히 눈을 못 뜨고 미동도 하지 않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곧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정신 줄은 놓지 않으셨습니다. 며날 며칠 음식물 대신 링거약만 투여됐습니다.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좋아졌다’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의식을 차리고 식구들을 비교적 잘 알아보시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병원 생활이 한달이 지났습니다. 장인어른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갔고 장모님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딸들도 대전과 성남에서 수시로 서울에 위치한 병원에 찾아가며 모든 식구들도 기진맥진해졌습니다.

병원에서도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술을 못 드셔서 생긴 여파가 아닌가 해서 정신과에서도 다녀갔지만 마땅한 대답이나 소견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정신이 맑아지면 장인어른께서는 자꾸 집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찾은 병원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일체 거동을 못하시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검사라는 검사는 다 받았습니다. 뼈 검사도 해봤지만 별다른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검사받아야 할지, 이미 받은 검사 또 받을 수도 없고 이대로 퇴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소변이라도 시원하게 보셔야 퇴원을 할 텐데....

많은 고민과 고심 끝에 퇴원을 결정했습니다. 허리 통증 때문에 식구들의 부축 받고 승용차로 걸어서 입원하셨던 장인어른은 한 달 만에 누워서 구급차를 타고 퇴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차도도 없고 치료방법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장모님 건강상태도 응급실 행이었고 연차, 월차, 반차 휴가까지 당겨 써 버린 처제도 힘에 부쳤습니다.

대전에 사는 큰딸도 주말마다 올라오는 일이 쉽지 않았고 큰 아이 어린이집에 맡겨 놓은 아내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간혹 어린이집이 끝나고 아이 둘 데리고 손에 장모님 식사 챙겨가며 대중교통으로 서울 병원까지 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장인어른의 동의가 절대 불가능해 개인 보험하나 들어두지 못했습니다, 장모님은 점점 쌓여가는 병원비도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아내는 괜히 병원에 모셨나하는 후회까지 했습니다. 입원 전에는 좀 불편하시긴 했지만 간신히 거동은 하셨으니까요. 아니 최소한 엎드려서 다닐 수는 이었으니까요. 두 발로 걷기 전 아기들이 네 발로 다니듯 말이죠. 하지만 입원 후에는 오늘 내일 돌아가실 것 같은 극한 상황이 자주 보입니다. 그렇다고 의료사고도 아닙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각종 검사와 영양제, 수면제 등 링거 투여밖에 특별한 조치는 없었으니까요. 때론 호전되기도 했으니까요.

퇴원 후 가족은 바랐습니다. 예전처럼 막걸리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사 하고 말이죠.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걸리는커녕 물조차 넘기기 힘든 상황이 됐다가 좀 기운차리셨다 하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막걸리를 드셔야겠다는 의지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생을 포기하신 듯했습니다. 어느 날은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돌아가셨구나’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집에서 약 열흘 동안 그렇게 계셨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한 차례 다녀갔고 마지막 방법으로 장모님은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드셨던 탓에 뭔가 의지할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하지만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으니 믿음을 갖기로 한 것도 마음속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누워 계시니 허리, 엉덩이, 등의 욕창이 빈대떡만큼 커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처 친척들은 왜 병원에 모시지 않냐고 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심정을 가족 말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지나다 지난 4월 10일께 서울 영등포 처가에서 성남에 위치한 노인요양병원으로 구급차를 타고 다시 옮겼습니다. 욕창이 너무 심해져 자칫하면 다른 질병보다 욕창 때문에 혹시 패혈증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면역이 약해 욕창, 폐렴 등으로 돌아가시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요.

처가의 냉장고 안 내용물을 모두 성남으로 옮겨왔습니다. 요양병원이 외진 곳에 있어 근처에 식당도 없습니다. 한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장모님은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십니다. 그래서 처제가 이틀에 한번씩 밥과 반찬을 실어 나릅니다. 다행히 성남 저희집에서 요양병원까지 차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모든 면에서 매우 수월합니다.

며칠 전에 빈대떡 크기만한 욕창 부위의 괴사한 부분을 긁어냈는데 의사께서 장모님조차도 그 모습을 보지 말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워낙 끔찍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그 부분을 긁어내는 동안 장인어른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옆 침실 환자 보호자의 말을 빌리자면요.

요양병원에서 튜브로 위장에 직접 음식물(캔에 들은 죽 완제품)을 투여한 이후 의식은 많이 또렷해지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혼자 걸으시거나 아기처럼 기어다닐 수 있는 정도까지는 감히 기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앉으실 수 있을 정도만 돼도 저희 가족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소한 욕창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장인어른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막 입원하실 때가 우리 큰 아이 어린이집 예비 소집할 때입니다. 곧 이어 집에서 조촐하게 작은 녀석 돌잔치도 했구요. 동시에 조금 넓은 3층으로 이사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성남 저희 집에 오셔서 아이들 돌봐주시고 손자들 과자 사주시는 것 좋아하시던 장모님께서 아직 한번도 이사한 집에 와보시질 못했습니다. 우리 큰녀석 어린이집 노란 가방 멘 것도 아직 못보셨구요.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아픈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가족 모두 힘들어집니다. 왜 노인분들이 병원에 가기 싫어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시골 어머니도 병원엔 절대 안간다고 하십니다. 멀쩡한 사람도 병들어 나온다고하면서 말이죠.

정말 기력이 약한 노인분들은 병원을 가시더라도 신중하게 잘 알아보고 생각해보고 모셔야할 듯 합니다. 노인분들은 이곳저곳 아픈 부위도 많고 어느과에서 어떤 검사를 받아야할지도 잘 모르기 때문이죠.

“내 병은 내가 알어, 그냥 이대로 살게 놔둬. 늙어서 그랴, 나는 병원 안가. 니덜이나 챙겨.”

이런 부모님들 많으시죠. 병원 가봐야 이곳저곳 안좋다라는 말만 잔뜩 나올테니까요.

장인 어른 입원기 쓰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