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가르치고

초등 2학년이 쓴 시 맞아요? "네 맞습니다"

윤태 2010. 8. 3. 10:40
 
어른도 쉽게 쓰지 못하는 시, 초등 2학년 친구의 대단한 실력


성남 대원초등학교 2학년 윤노영 학생. 시를 쓰는 감각이 남다릅니다

보름전 제가 수업하는 초등 2학년 친구가 8월 중순에 한 학년에 7명 밖에 되지 않는 경기도 양평 남한강 바로 옆자리로 이사한다는 소식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포스팅에서 그 친구가 매우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데 교육보다는 자연 속으로 귀의하는 부모님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엊그제 동시 한편을 썼다며 연필로 쓴 꾸깃꾸깃한 종이 한장을 가져왔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부모님 혹은 학교 선생님이 알려준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부모님께 확인 결과 여행 다녀오다가 갑자기 비가 오는 장면을 차 안에서 음미하면서 집에 돌아와 바로 쓴 시라고 합니다.


제가 시를 전공하진 않았지만 문학잡지 두어 군데와 지역신문, 온라인 등에서 수상경력이 있고 나름 시 공부와 습작을 열심히 해봐서 시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자부하는(?) 터라 그 친구의 시는 정말 남달라 보였습니다.


어른들도 이런 동시를 써보라고 하면 머리 아프다며 쉽게 포기할 것입니다. ‘시인’의 관점에서 이 친구의 시를 평가 혹은 심사해봤습니다.




비오는 날


                   
                                        성남 대원초등학교 2학년 윤노영




저어기서 구름이 빗방울 친구와 소나기 친구와


번개 친구를 데려온다


맨 뒤에서 아기 이슬비도 놀러온다


구름이 친구들과 하늘 소풍을 오나보다


저어기서 해 친구도 온다


구름은 빗방울, 소나기, 번개, 아기 이슬비가


좋아하는 해를 밀쳐낸다


그 바람에 해가 넘어지자 빗방울과


소나기, 아기 이슬비가 울어서 비가온다


번개도 화가 나서


천둥이를 불러와서 같이 화를 낸다


우르르쾅쾅 쏴아아아~



윤노영 학생이 쓴 시 원본. 즉석에서 쓴 시 입니다. 마지막부분 '비가 옵니다', '화를 냅니다' 는 각각 '비가 온다, 화를 낸다'로 수정했습니다. 아이가 시 쓰기에 몰두하다 보니 문체가 순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의미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



-자연현상 매우 논리적이고 상징적으로 진솔하게 표현


'저어기서'라는 표현은 멀리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저기'를 시의 기본적인 특성인 운율, 리듬감을 위해 '저어기서'라고 늘여 썼습니다. 이런 경우를 시적 허용이라고 하죠. 시에 대한 이론을 알고 있는 친구입니다.


구름이 주축이 돼 빗방울, 소나기, 번개, 아기 이슬비 등을 데려오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비를 뿌리는 것으로 구름이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굳이 '아기 이슬비'라고 표현한 것은 이슬비가 빗방울, 소나기, 번개 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을 감안해 '아기'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발한 발상입니다.


'하늘 소풍'을 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부분이 떠오릅니다. 초등 2학년인 이 친구가 천상병 시인의 이 시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듭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하늘 소풍'이라고 표현한 듯한데 우연 치고는 참 '고품격'의 시어 선택입니다.


'저어기서 해 친구도 온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구름, 빗방울, 소나기, 번개, 이슬비 등은 어찌 보면 분위기상 뜨겁게 반짝이는 해와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이들 모두를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포용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구름이 해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빗방울, 소나기, 번개, 아기 이슬비가 그렇게 좋아하는 해를 왜 구름이 밀어내고 있는 걸까요? 비가 내려야 하는 운명, 숙명, 자연 현상 즉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담아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해를 밀치고 그 결과 해가 넘어지자 빗방울, 소나기, 아기 이슬비가 울어서 비가 온다'라고 썼습니다. '해가 사라지다, 구름에 가리다' 등의 일상적인 표현이 아닌 '해가 넘어진다' 라는 시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해가 넘어진 결과가 어떤지 시적인 표현을 통해 잘 풀어가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울어버리니 번개도 화가 났고 번개가 치니 천둥도 따라올 수 밖에요. 천둥을 사람처럼 '천둥이'라는 표현으로 친근감을 더했네요. 의인법이죠. 


소나기, 아기 이슬비, 번개, 천둥이, 빗방울 등이 동시에 화를 낸 결과 '우르르쾅쾅 쏴아아아~' 라는 의성어로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한 줄로 토해냈습니다. 군더더기도 없고 장황하지도 않은 꼭 필요한 단어들을 이용해 진솔하고 상징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동시는 맑은 날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 혹은 장마전선, 대기불안의 영향으로 순식간에 내리는 자연현상을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시적으로 풀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사실적이면서도 시적표현을 통해 그 친구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감수성이 뛰어난 친구입니다.


감수성 메마른 요즘, 동시 쓰기 필요하다

시라는 것이 어려운 어휘와 미사여구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상징적인 의미 없이  논리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시가 아닌 '의미 불통, 언어 나열'에 불과합니다.


즉석에서 쓴 만큼 저는 이 친구가 천재적인 시적 능력이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2주 후면 이 친구와 더 이상 독서토론 수업을 같이 할 수 없음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나저나 초등생 자녀를 두고 계신 부모님들 혹시 이 친구가 부럽지 않으신가요? 아마 8월 중순 남한강 바로 옆자리로 이사하게 되면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아참, 요즘처럼 험악한 세상, 아이들의 정서가 많이 메마르고 감성이 잘 표현되지 않는 시대이죠. 윤노영 학생처럼 많은 친구들이 동시를 즐겨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