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과연 시(詩)인가?" 라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천천히 읽어보시길
-쓸데없이 함부로 내뱉는 언어 같지만 들여다보면 통쾌, 상쾌 유쾌
지난 87년 출판된 김영승 시집 <반성>
미사여구의 시적 표현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 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인 표현을 통해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시라는 틀에 박혀 있는 독자들에겐 '저것이 과연 시인가'라고 반문할 정도 혹은 너무 기가 막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하는 시가 그런 예다.
그런 면에서 김영승의 시집 <반성>은 주목할만하다. 어떻게 보면 일기처럼 투박하게, 거침없이 내뱉어 놓은 것 같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다. 늘 접하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특별한 발견'을 쏟아내는 그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다음은 그의 시 일부이다.
그럼 음모 딱 한개
그것도 안 팝니까?
그럼 코딱지는 팝니까?
여인이여
당신은 당신의 오줌이나 똥을 싸서 즉석에서
나에게 팔 수 있습니까?
당신에겐 필요 없는 것인데.
-반성 784 중에서-
-똥과 오줌을 즉석에서 싸서 내게 팔라고?
-즉석 말고 은밀히 똥 오줌 팔라고 하면 팔것인가?
참 싱겁고 어이없다. 시인은 음모, 코딱지, 오줌, 똥 별걸 다 판매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굳이 필요 없는 것인데 왜 못 파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자신의 오줌, 똥을 그 자리에서 판매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조건을 바꿔 '즉석'에서 팔지 말고 집에서 똥 오줌을 누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팔라고 제안을 한다면 어떨까? 전자보다는 후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경제 논리에서 보면 내게 아무 필요 없는 것을 팔아 수익까지 챙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왜일까? 도덕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단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시인은 겉으로 우아한 척 하면서 꼼수를 두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 내지 이중적 양심을 질타하고 있다.
마치 변호사, 교수 등 일부 지식층들이 성추행, 성폭행을 한다는 뉴스 보도처럼 말이다. 시인 자신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식적 양심을 다 같이 반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독자 나름이겠지만 똥, 오줌을 매매의 대상으로 설정한 그 자체가 참으로 기발한 상상력이고 이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세계는 심오하다.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자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16 전문-
-만취 상태에서 쓴 '금주 시', 왜 그랬을까?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영승은 <반성> 시집을 내던 80년대 중반 당시 실업자로 지내며 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의 폐인처럼 술을 마시며 시를 썼던 시인이다. 술을 마시지 말자는 다짐과 반성 또한 술 때문에 흐트러진다. 술을 마셔야만 그 반성과 다짐을 기억해내고 또다시 반성을 할 수 있었던 그.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뭔가를 반성하며 심기일전하고자 한다면 일반적으로 맑은 정신일 때 다짐을 하지만 시인은 취중에서 이것이 이루어진다. 남들이 볼 때는 직업도 없으면서 매일 술에 젖어 허접한 시나 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인은 취중에 반성에 대한 독특한 정신세계를 구축해나간다.
마치 쫓기는 도둑이 평소에는 넘지 못한 담벼락을 자신도 모르게 가뿐히 뛰어넘는 괴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시인은 술을 마셨을 때의 몽롱한 자신만의 정신세계에서 남들이 잘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한 편의 시로 토해내고 있다. 참으로 특이한 기법이다.
김영승 시인의 시는 대부분 이렇다. 일상어로 쉽게 쓴 것 같지만 한 편 한 편 읽고 나면 "아, 그렇구나"하며 고개가 끄떡여지는 시편이 많다. 한마디로 속이 시원하다.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던 숙변이 한꺼번에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이는 과감한 직설적 표현과 함께 읽기를 마쳤을 때 많은 이들에게 공감 가는 메시지를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 기발한 상상력을 뽑아내는 시인의 탁월한 능력을 높이 살만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라는 문학 작품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어렵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핵심을 잡아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한 시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시인 자신만이 그 정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 찾아내는 건 어디까지 독자들의 몫이며 시인은 몇 날 며칠을 고뇌해 한 편의 시를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는 수십 번, 수백 번을 되뇌며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시인과 독자 사이에 끊임없는 숨바꼭질이 계속된다. 그래서 어렵고 심오하며 심지어 '의미 불통'이라는 혹독한 시 세계에서 시인과 독자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의 묘미가 아닐까?
-반성을 읽고 우리는 뭘 반성해야 하는가?
전에 모 국회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한 사건을 두고 한 방송인이 모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걸 떼어내야 해요."
독자들 대부분은 아마 '그걸'을 '성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뜸을 들여 한 그의 뒷말은 이것이다.
"국회의원 배지요."
단 두 줄이지만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가 있으며 반전을 통한 정곡을 찌르는 의미가 감춰져 있는 한 편의 훌륭한 시가 아닐 수 없다. 김영승 시인의 <반성>도 이 두 줄 '시 아닌 시'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연쇄살인, 성추행, 성폭행을 비롯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가 하면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 반인륜적인, 차마 입에 담지 못하거나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사건들이 뉴스보도를 통해 종종 흘러나오고 있다.
시국이 혼란할수록 이를 우회적으로 꼬집거나 질타하는 문학은 더욱 활기를 띤다. 특히 시 문학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사회 정화 차원의 문학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짧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그릇된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그래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시풍이 불어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집을 읽고 어떤 뭔가를 반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