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만의 친정 휴가 사건
큰누나는 왜 혼자서 버스타고 친정에 가는걸까?
워낙 급하게 묻고 나도 곧 나가봐야 하는지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부터미널에서 타면 돌아가고 서초동 고속터미널에서 타면 서해안 고속도로로 직통으로 갈 수 있다고 알려줬다.
잠시 후에 버스를 잘 탔는지 확인 전화해보니 누나는 헤매고 있었다. 호남선인지, 경부선인지 헷갈려하고 있었다. 경부선쪽으로 갔다가 노선이 없다는 것이다. 20여년만에 버스 타고 친정에 내려가니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에서 서산 가려면 경부선타고 천안-온양-예산-당진-서산 등으로 돌아갔지만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린 이후로는 호남선으로 바뀐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혼자서 버스타고 친정에 가는지? 친정에 갈일이 있다면 매형, 아이들과 함께 편하게 승용차 타고 가면 될 것을 말이다. 전화로 교통 정보를 알려주는 상황에 살짝 문자를 보내봤다. 왜 혼자 버스타고 서산 가냐고?
답문자가 왔다. 큰누나는 43년만에 친정에 휴가를 간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르게 말이다. 매형에게는 “몇일 안보이면 그런 줄 알아라” 라고 지나가는 말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는 이번 사건을 ‘큰 모험’이라고 했다. 내가 볼 때는 그다지 ‘모험’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누나 입장에서는 큰 모험 이었던 모양이다.
올해 43세의 큰누나! 시부모님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에 조카까지 같이 살았다. 그 복잡한 집에서 나도 시댁 식구들과 함께 2년 조금 넘게 누나집에서 기거했었다. 큰며느리이다. 누나는 명절 때 친정에 간 기억이 없다. 시골 부모님 생신이나 휴가, 모내기 등 누나 식구들이 몰려 시골에 다니긴했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이다. 늘 맏며느리로써 시댁 일에 주력해야 했다.
이정도 되면 누나가 이번 ‘나홀로 친정행’을 왜 ‘큰 모험’이라고 표현했는지 그 심정을 이해할만하다. 20여년 만에 혼자서 버스를 타고 친정으로 휴가가는 그 설레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엄마가 뿔났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김혜자-한자)가 ‘가사파업’을 외치고 한시적으로 독립해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다.
늙은 시아버지를 두고 며느리가 굳이 한시적이긴 하나 따로 나가 생활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비현실적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했다는 주장과.... 아니다, 한자가 그만큼 했으면 이제는 어느정도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한번쯤 논쟁을 벌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집 아내도 아내로써, 엄마로써, 며느리로써의 삶을 은근히 강요당하며 주체적인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43년만에 친정인 서산으로 휴가를 갔다. '엄마로써, 아내로써, 며느리로써'가 아닌 딸로써, 마음 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