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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조각 모음

열심히 쓴 글이 묻히게 됐는데요...

사보에 올리려고 <나에개 힘이 되는 것>을 주제로 글을 썼는데요, 이미 마감했다고 하네요. 글이 좋으면 대체될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썼는데 내밀지도 못하고 묻히게 되었습니다. 잘쓴 글은 아니지만 진솔하게 써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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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힘이 되는 것>

  나에게 힘이 된다는 것(사람)은 다른 말로 그것(사람) 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혹은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단순한 취미나 여가 활동이 아닌 존재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것을 보면 내게 힘이 되는 그 무엇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식상할 수 있겠지만 내게 힘이 되는 것은 바로 4살과 생후 8개월 된 두 아들이다. 둘째는 출생 당시 생물학적 존재의 아빠에서 지금은 감정과 느낌을 아빠와 교감하는 따스한 폼속의 아빠가 되었다. 일방적으로 본능만 표출하던 녀석이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며 ‘일방적’이 아닌 아빠와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는, 즉 아빠의 존재를 알아가고 있으니 어찌 힘이 되지 않겠는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한때는 아이들이 부담이라고 생각한때도 있었다. 부담이란 어떤 의무나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이를 ‘회피’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보다도 더 잘 먹이고 입히고 좋은 것을 해줘야한다는 강박관념적인 욕구랄까. 그 욕구가 자꾸만 커지다보니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안 경제 문제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갖고 싶은 것 졸라대지만 선뜻 그러질 못하고 애꿎은 시금치만 밥에 얹어 놓는다. 이럴 때면 마음이 쓰라려 빨간약이라도 바르고 싶어진다.

  낮 동안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고민에 밤잠 못자고 뒤척이고 때론 한숨도 쉬고 그러다 날이 밝아 아이들 방에 가보면 간밤의 고민과 근심, 걱정이 죄 사라진다. 육체는 내가 줬지만 누구의 아름다운 영혼이 들어왔을지 모르는 태초 하느님의 형상을 그대로 빼닮은 둘째 녀석이 방글방글 웃으며 ‘깍깍’ 소리를 지르고 있다. 첫째 녀석은 눈을 비비며 “아빠 나 일등 일어났어?” 잉, 나 1등 일어나게 해줘.“라고 떼를 쓰는 그 순수한 모습을 보면 아빠의 존재감에 벅차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나의 존재를, 아빠의 자리를 다시금 굳건히 지키게 만드는 녀석들이다.

  오늘 낮에 지인(총각)과 문자를 나눴다. 내가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지인은 내게 착한 아내와 사랑스런 두 아들이 있으니 어느 누구보다도 마음이 부자라고 했다. 어찌보면 이상주의 혹은 도덕교과서 같은 멘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먹고 살아갈 길이 만만치 않은 세태에서 마음이 부자라? 총각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지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질로 대신할 수 없는 것 혹은 물질로 다 해 줄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밤에 센스티브한 감정으로 솔직히 약한 마음이 들 때도 종종 있지만 두 아이의 존재가 그것을 상쇄하는 셈이니 따지고 보면 병주고 약주는 녀석들이다.

  개구리는 움츠려야 멀리 뛸 수 있고 새총은 고무줄을 최대한 당겨야 멀리,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힐 수 있다. 두 아들은 움츠린 개구리나 세게 당겨진 새총의 고무줄과 같다. 이 상황이 얼마나 큰 운동에너지로 전환해 더 높이, 멀리 뛰어나갈 수 있게 만드는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얼마나 내게 힘이 되는지 굳이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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